언어적 동면; 선택적 함구증 (Selective Mutism)

“에이미는 무슨 동물을 제일 좋아하지? 한번 그려볼까?” 소녀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니, 입을 꼭 닫은 채, 고양이를 한 마리 그려놓았다. “음… 이건 무슨 동물일까. 난 이 동물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아 답답하다… 크…크…. 크…로 시작하는데,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니?”
소녀가 대답하기를 한참 기다리며, 소녀의 침묵을 받아들였다.

“이 동물 이름이 C로 시작했는데…. 도통 기억이 안나네….” 대답 하렴… 대답 하렴…속으로 되뇌이며, 누가 먼저 입을 여나 내기라도 하듯이 소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드디어 소녀가 천천히 입을 열였다. “C…A….T.. 캣이예요. 이건 캣이예요. 그것도 몰라요?” “아, 맞아… 그랬구나. 그럼 여기 플레이 도우가 있는데 우리 같이 다른 동물을 만들어 볼까? 에이미는 뭘 만들어 보고 싶을까?” 다섯 살 난 소녀는 핑크색 플레이 도우를 선택한 후 그것을 길게 길게 늘여 나갔다. “이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핑크색. 그리고 이건 길고 긴 뱀이예요, 뱀은 동면을 해요. 크고 깜깜하고 추운 동굴 속에서 동면을 해요.”

동면이라… 크고 깜깜하고 추운 동굴 속에서 잠을 자는 동물이라고…
다섯 살 소녀가, 그것도 열대의 사막 국가에서 온 소녀가 선택한 어휘와 주제라기엔 눈길을 끈다. 첫 세션 10분동안 주고 받은 대화이다. 다섯 살 난 이 소녀가, 석유공학을 공부하는 아버지를 따라 사우디 아라비아로 부터 텍사스로 건너온 것은 두 해 전이고, 현재는 아버지가 공부하는 대학의 부속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소녀와의 첫 치료 세션을 녹화한 비디오를 확인한 그녀의 부모들은 무척 놀라와했다. 소녀가 미국에 온 뒤로,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입을 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세 살에 텍사스로 건너와서 두 해가 지나자, 소녀는 어느 미국 아이들 보다 유창하게 영어로 말을 하고 chapter book을 줄줄 읽게 되었지만, 집을 나서면 벙어리가 된다. 유치원에서 매 학기 있는 학업 능력 측정에서 소녀는 두 번 다 실패했다.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소녀가 유치원에서 배우는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행히 몇몇의 친구들과는 어울리는 편이지만, 친구들에게도 한마디도 건넨 적이 없다. 부모들은 그런 소녀가 안타깝기만 하고, 그녀의 남다른 총명함을 증명할 길이 없어 더더욱 속이 상했다.

두번 째 치료 세션. 소녀가 이번에 꺼내놓은 상징과 이미지는 북극곰이다. 생선을 먹고 새하얀 털로 덮인, 그리고 역시 동면을 하는, 자기를 닮은 지구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착하고 똑똑한 동물이라고 했다. 자기가 아는 어느 북극곰 가족은 춥고 캄캄한 동굴 속에서 긴긴 동면을 하고 있다고 했다. 북극곰과 생선을 자기 손가락 한마디 만하게 종이 위에 그려 놓았다. 손가락 마디만큼 위축된 다섯 살 짜리의 자아.

첫번째와 두번째 세션을 통해서, 소녀는 자신의 처한 심리적. 언어적 상황을 “동면”이라는 반복되는 은유를 통해 치료자에게 충분히 전달 했다. 물론 이런 류의 은유적 상징은 이후의 세션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났다. 아랍어를 구사하는 정통 무슬림인 부모의 외동딸로, 소녀가 느끼는 미국은 춥고 캄캄하고 커다란 동굴 같은 곳이고, 자신은 그 속에서 동면을 하는 중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필자는 소녀가 던지는 상징을 해석하였다. 미국이라는 사회속에서 느끼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가 자신의 뿌리인 무슬림의 전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에 소녀는 아마도 심리적 압도를 느끼지 않았을까. 공기를 호흡하듯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할 나이였기에 영어 구사 능력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음에도, 친구와 선생님들에게 이방의 언어인 영어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소녀를 압도하는 두려움이었는지 모르겠다. 특별히 처리된 그들의 할랄 음식을 먹는 것만 허용되었기에, 소녀는 유치원의 다른 친구들이 먹는 음식 대부분을 먹을 수가 없었다. 우유와 과일 외에는… 다섯 살 꼬마들에게서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을 박탈한다면, 꼬마들은 어디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어느 날 용기를 낸 소녀가 엄마가 싸준 도시락 대신, 점심으로 나온 피자 한 조각을 먹는데 30분이 걸렸다고 유치원 선생님은 전했다. 생활의 모든 면이 자신의 가족환경과는 너무나 다르기에, 가족환경을 넘어서 자신의 통제 밖의 상황에서 소녀가 느꼈을 심리적 압도감이 어떠하였을지는 짐작이 간다. 자신의 언어 그리고 문화적 배경과 자신이 하루 하루 겪어 나가는 학교 생활의 간극이 지극히 당황스러웠던 소녀는, 크고 어두운 미국이라는 동굴 속 처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언어적 그리고 문화적 동면 상태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지도 모른다. 결국 소녀가 보인 선택적 함구증은 (Selective Mutism) 언어적 동면 상태였던 것이다.

선택적 함구증 (selective mutism) 이라고 하는 아동과 청소년들에게서 간혹 발견되는의사소통의 장애는, 충분한 언어적 능력이 있음에도, 특정 상황에서 특정인들하고만 대화를 하는 것이 특징인데, 병리학적으로는 사회적 불안 장애로 분류가 된다. 말을 하지 않는 그 근간에는 깊은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수업 참여시 대답을 않거나 발표차례가 되어도 입을 열지 않기에, 무례하다거나 지나치게 수줍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고, 교우관계에도 제외된다든지 불링의 대상이 되는 이차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가까운 부모와 가족들과만 대화를 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사회 생활, 학교 적응에 상당한 문제가 되는 의사소통 장애이다. 환경을 바꾼다든가, 기저하는 불안을 완화하는데 촛점을 맞춘 심리 치료가 증상을 완화시길 수 있다.

선택적 함구증을 보이는 아동의 치료에 있어서, 그들의 심리적 문제에 접근하기는 방법으로는 놀이와 그림이라는 매체가 흔히 사용된다. 어린 아동들은 언어를 배워가는 중에 있고 자신의 내면을 언어로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치료의 관건은, 아동의 놀이와 그림 속에 나타나는 상징과 은유를 포착하고 해석할 수 있는 치료자의 직관이라고 본다. 운이 좋게도, 내담자인 소녀와 치료자의 커뮤니케이션은 첫 대면에서부터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에이미는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동면을 하는 뱀을 통해 표현하였고, 두번째 세션에서는 북극곰을 데리고 왔다. 두 동물의 공통점은 동면. 소녀의 고향은 열대의 사막 국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 소녀를 동면에서 깨울 것인가? 소녀는 다시 한번 단서를 던져주었다.
“왜냐하면 난 선생님 보다 똑똑하니까요!” 에이미는 7개월 동안 지속된 모든 치료세션을 통해 반복되는 주제를 던져 주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그 누구보다 우수하고 똑똑하기를 바라고, 또 자신의 바람을 소녀에게 매일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고 했다. 소녀의 정서의 근간은 우월을 향한 의지로 보인다. 무슬림들의 정수가 그런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치료적 접근으로는 우선, 치료자와 만나는 동안, 상황의 통제권을 소녀가 갖도록 하며, 소녀가 느끼는 편안한 공간 comfort zone, 을 점진적으로 넓혀감으로서 깊은 곳에 내재하는 불안감을 낮추어 주고자 했다. 동시에 똑똑하고 자존심 강한 소녀를 자극하기로 했다. “에이미, 니가 똑똑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을 해 보이세요!” 눈높이를 다섯 살로 맞춘 치료자는 매번 에이미를 자극하며, “다른 사람들은 내가 너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넌 나하고만 대화를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하니깐! 자,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말 해봐.”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이 방법이 결국은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가지 다양한 치료기법을 적용한 후에, 결국 1월에 치료실로 걸어들어온 소녀는, 8월 한여름에 떨리는 목소리로 깊은 숨을 내쉬며 다른 치료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고, 상점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은 건넬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치료실을 떠났다. 달라진 소녀를 반가와 하며, 소녀의 부모는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싶다고 초대를 했지만, 필자 역시 무슬림 문화가 익숙하지 못했던지라, 마음으로만 초대에 응했다.

꼭히 언어와 문화가 다른 경우에만 선택적 함구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은 개인마다 다양하겠지만, 이 경우에 있어, 소녀의 불안의 핵심은 그녀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언어적 문화적 배경과 소녀가 겪어내고 살아가야하는 언어적 문화적 배경간의 거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눈을 돌려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닌듯 하다. 한국인을 부모로 둔 아동들 중에는 앞서 제시한 이같은 이유로 사회적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흔히 보이고,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온 이민 1세대를 부모로 둔 아동들 역시 예외는 아닌듯 하다. 장기적인 발달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아동 (혹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뜻하지 않게 사회적 상황에서 벙어리가 되어야 하는 이런 심리적 곤란은, 시간이 지나고 사회적 경험이 쌓이면서 완화되기는 하겠지만, 당장 유치원을 가야 하고, 학교를 가야하는 어린 아동들로서는 겪어내기 쉽지 않은 불안과 압도감일 듯하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들과 선생님도 가슴아프기는 마찬가지 일테고. 하지만, 최소한 부모가 아동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설령 동면상태에 놓인 2세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좀 더 빨리 동면에서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첫 문장

첫페이지를 시작하려는 이 깊은 새벽 난데없이 번쩍하고 밝은 빛이 온 방에 들이차더니 천둥이 울리네요.
공교롭게도..곧이어 천장에 듣는 빗소리… 격렬합니다.
이곳은 휴스턴. 텍사스의 사월 봄 밤이 깊어 이제 곧 새벽이 다가옵니다.
월요일 첫시간 강의를 앞둔 일요일은 어째서인지 통 잠을 쉽게 들 수가 없네요.
깊은 밤을 뒤척이길 몇 달째,  긴 밤 시간을 조금은 생산적으로 보낼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두 학기째라 적응이 되었을까 했는데, 영어로 강의하는 일은 아직도  만만하지 않은 일인가 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나라, 엄마에게서 배운 말이 아닌 책에서 배우고 낯선 사람들에게서 배운 말을 쓰며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의 수고로움을, 우리 말의 푸근함으로 위로 받으며 풀어 놓으려고 합니다.
이야기 시작해 볼까 해요.